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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자 특별선거는 내년 1월

타계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후임자 선정을 위한 작업이 본격화되고 있다. 디발 패트릭 매사추세츠 주지사는 지난 31일 "케네디 의원의 후임자를 뽑을 특별선거 날짜를 내년 1월19일로 지정하고 특별선거가 있기 전까지 상원의원직을 수행할 임시 후임자를 즉각 지명하기 위한 법안 개정작업을 위해 의회와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혔다. 패트릭 주지사는 보스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매사추세츠 유권자들은 상원의원의 공석을 메울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며 "임시직 상원의원 지명이 특별선거를 하기 전까지 매사추세츠를 완전히 대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앞서 패트릭 주지사는 지난 26일 케네디 상원의원의 후임자가 내년 1월 특별선거로 뽑힐 때까지 임시 후임자를 주지사가 즉각 지명하도록 주 선거법을 바꾸는 방안을 지지한다고 말한 바 있다. 현행 매사추세츠주 선거법에 따르면 상원의원이 비면 145~160일 사이에 특별선거로 후임자를 선출하도록 돼 있어 현행 규정대로라면 특별선거가 치러지는 내년 1월까지 민주당은 공화당의 필리버스터(의사진행방해)를 막을 수 있는 60석에 한 석이 모자라는 59석 상태로 건강보험 개혁입법 표결에 임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2009-08-31

막내린 케네디 정치가문…"이름만 보고 찍는 투표 케네디가 마지막 될 것"

"더이상 정치명문 가문이라는 명성으로 표찍어주는 데 염증난다" 정치 전문가들은 "젊은 유권자들이 더이상 명문가라는 꼬리표 하나만으로 표를 찍어주는 시대는 지났다"며 "케네디 가문이 명문 가문의 정치적 혈통에 의존해 온 가문 정치의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한 여기에는 케네디 의원의 타계와 이로 인한 케네디가의 단절이 남긴 정치적 공백이 너무 커서 케네디 가문이 가졌던 카리스마와 그들이 남긴 정치적 유산을 이을만한 정치가문이 한동안 등장하기는 힘들 것이라는 지적이다. 보스턴 대학의 정치학 교수인 톰 훼일런은 "케네디가 통치의 마지막 연결고리였던 에드워드가 타계하면서 당분간 케네디가의 성화를 이어받을 누군가가 등장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유권자들은 조지 부시 정권을 거치면서 "단지 정치에서 유사한 이름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 자동적으로 표를 던지는데 신중하게 됐다"고 지적했다. 2008년 '폭풍의 한 가운데 선 케네디가'의 저자인 윌 스위프트는 지난 200년간 애덤스 루스벨트 케네디 부시 등 4대 정치가문이 있었지만 케네디가에 견줄만한 가문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케네디가의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이민과 건강보험 분야 등 입법 분야에서 그들이 남긴 유산들은 미래 세대에서 빛을 발할 것으로 보인다.'케네디가:미국의 에메랄드 제왕'의 저자인 토머스 마이어는 "가난한 아일랜드 이민자 출신인 케네디가가 남긴 잊혀질 수 없는 유산은 위대한 기회의 자유"라며 "이는 아메리칸 드림과 자유를 구현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케네디 의원과 케네디 가문은 모든 인종의 사람들이 미국에 올 수 있도록 변화를 시작하게 만든 개척자들"이라며 "그가 후원한 지난 1965년의 이민 국적법은 미국을 변화시켰으며 이는 오래토록 잊혀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영 기자

2009-08-31

명성 뒤엔 최고 보좌진 있었다…탁월한 능력·충성심으로 무장

25일 뇌종양으로 타계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매사추세츠.사진)이 진보계 거두로 탁월한 의정활동을 보인 이면에는 탁월한 보좌관들의 뒷받침이 있었다. '워싱턴 포스트'(WP)는 28일 "의사당 러셀 빌딩 317호실은 케네디 의원의 집무실이었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해 일하고자 전국에서 모여든 수백명 지원자들을 훌륭한 분야별 전문가로 키워낸 '케네디 스쿨'과도 같은 곳이었다"고 보도했다. 케네디 의원실은 의료보험으로부터 노동과 외교 분야에 이르기까지 정계내 진보정책의 산실이었으며 케네디 의원은 다양한 이슈들에 정통한 인재들의 육성과 발굴에 언제나 힘을 기울였다. 그는 군사정책 자문을 위해 정기적으로 현역 군인들을 채용하기도 하는 등 분야별로 실력있는 인재들을 보좌진 실력면에서 의사당 내 최고 수준으로 평가받고 있다. '케네디 동문'들은 버락 오바마 행정부를 비롯해 정치와 법조언론보건 등 미국내 여러 분야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고 있다. 스티븐 브레이어 대법관과 오바마 대통령 수석정책 보좌관인 멜러디 반즈 모두 케네디 의원의 고문이었으며 백악관 보좌관인 그레고리 크레이크와 제임스 스타인버그 국무부 부장관은 그의 정책보좌관이었다. 또 최근 구제금융을 받은 대기업의 고위임원 보수 문제를 전담하고 있는 케네스 파인버그 변호사는 케네디 의원의 비서실장 출신이다. 또 2004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존 케리 상원의원은 케네디가 첫 상원의원 선거에 나섰을 때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그러나 능력이나 업무관계 이상으로 보좌진은 케네디 의원에게 충성했으며 케네디 역시 보좌진에게 신의를 지켰다. 일부 보좌관들은 보다 고소득의 민간 분야 제의를 거부하고 끝까지 케네디 의원 곁을 지켰다. 케네디 의원이 지난 1962년 첫 선거전 당시 채용했던 바버라 솔리어티스는 아직도 그의 보스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으며 매사추세츠 정계에서 의원 지역 사무실 운영에 관한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케네디 의원이 지난 1년여 투병으로 의정활동을 하지 못하는 기간에는 보좌진들이 대신 건강보험 개혁과 같은 역점 분야에서 주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현 보좌진은 그의 사후 60일간 그대로 유지된다. 오늘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케네디의 유능한 보좌진들이 향후 어떤 진로를 결정할지 관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2009-08-28

"굿바이, 테드" 오늘 국립묘지에서 장례식…오바마도 참석

25일 77세를 일기로 영면한 에드워드 '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장례행렬이 슬프고 엄숙한 분위기 속에서 고향을 떠났다. 케네디 의원의 관은 두번째 부인인 미망인 빅토리아(비티) 여사와 가족 친지들이 보는 가운데 성조기에 덮인 채 의장대에 의해 영구차로 옮겨졌다. 그의 아들 패트릭 케네디 로드 아일랜드주 하원의원은 전날 불침번을 선뒤 장례행렬에 동참 아버지의 마지막 가는 길을 끝까지 지켰다. 케네디 의원의 시신은 28일 6대의 리무진과 경찰 호위 오토바이와 함께 매사추세츠주 하이애니스 포트에 자리잡은 자택을 떠나 보스턴의 존 F 케네디 도서관으로 옮겨졌다. 도서관 인근은 일찍부터 케네디의 마지막 모습을 보려고 전국 각지와 유럽에서 모인 관광객과 추모객으로 붐볐다. 그의 시신은 28일 오전 10시~오후 4시(동부시간)까지 일반시민에 공개됐으며 오후 7시 외부인의 출입을 차단한채 가족만의 비공개 추도 행사가 열렸다. 유족은 29일 '영원한 도움의 성모' 성당에서 장례식을 거행한뒤 시신을 워싱턴DC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로 옮겨 오후 5시 안장식을 치른다. 이곳에는 먼저 세상을 떠난 에드워드의 형님 존과 로버트가 바로 옆에 묻혀있기도 하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장례식에 참석해 조사를 남길 예정이나 안장식에는 참석하지 않는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도 장례식에 참석할 뜻을 밝혔다. 한편 9월14일 발매될 예정인 케네디 의원의 회고록 '진실한 나침반'은 미리 수천건의 주문을 받아 아마존닷컴 자서전 분야 1위.전체 베스트셀러 순위 7위에 오르는 '출간전 베스트셀러'란 진기록을 세웠다. 봉화식 기자

2009-08-28

케네디 빈자리 커진 의회 '타협보다 대립' 커질 우려

48년동안 상원의 터줏대감으로 카리스마.입법 열정.초당파적 친화력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케네디 의원이 사라졌다. 이에따라 의회에 일종의 '권력 공백' 상태가 지속되며 타협보다 대립의 갈등이 커질 것이란 우려가 나오고 있다. 미국의 주요 언론은 27일 "의회에서 케네디가 차지했던 공백을 아무도 메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있다"고 보도했다. 그의 영향력과 대중성은 중요한 이슈를 둘러싼 협상이 필요한때 당 노선을 넘나들며 힘을 발휘했고 법안이 교착상태에 빠졌을 때 케네디 의원이 나서서 문제를 푼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것이 공통된 평가다. CNN 정치평론가 글로리아 보거는 "케네디는 언제 협상을 해야 하고 언제 타협을 해야하는지 아는 드문 정치인"이라며 "특히 그는 조지 W 부시 대통령과도 함께 일하는 법을 알고 있었다"고 강조했다.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표방했던 케네디 의원은 노선상 좌우의 분열을 잇는 가교역할을 절묘하게 해내는 능력을 지녔다는게 동료 정치인들의 평가이기도 하다. 케네디 의원이 투병으로 의정활동을 중지했던 올해 민주당과 공화당의 협상은 거의 이뤄지지 않았고 경기부양책이나 내년도 예산안 표결시 크로스 보팅보다는 엄격한 당론 투표가 주로 이뤄졌다고 CNN은 보도했다. 탁월한 협상가인 케네디의 부재로 의회에 정치적 절충 분위기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27일 "그의 공백을 메울 후보로 존 케리(매사추세츠) 크리스토퍼 도드(코네티컷) 탐 하킨(아이오와) 딕 더빈(일리노이) 러스 페인골드(위스컨신) 등 고참 상원의원이 거론되고 있지만 누구도 케네디의 명성 서열 인간적 매력 해박한 입법지식 이념적 열정을 대신할수 없다"고 단언했다.

2009-08-27

로열패밀리 케네디 가문, 가난한 이민자에서 미국의 상징으로

존 F.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과 박물관 벽에는 수백장의 사진이 걸려 있다. 그 중 관람객들의 눈길을 잡는 사진 한 장은 1930년대 후반에 찍은 가족 사진으로 조 앤 로즈마리 케네디가 그들의 9명의 자녀들과 함께 웃고 있는 모습이 담겨 있다. 관람객들은 왜 이사진에 주목할까. 물론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있기때문이지만 법무장관 하원의원은 물론 장애인을 위한 올림픽 창시자 등 미국 역사에서 주목할 만한 사람들이 한 가족 사진 안에 담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케네디가는 미국의 유물이며 명문가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에드워드 케네디의 사망으로 케네디가의 1세대 시대가 사실 막을 내렸지만 케네디가는 앞으로 수백년을 거쳐 살아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너무도 미국적인 케네디가는 처음부터 명문가로 출발한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뿌리는 먹을 것이 없어 아일랜드에서 보스톤으로 건너온 가난한 이민자였다. 하지만 2대부터는 지방 정계에 진출해 두각을 나타냈고 3대에는 부를 축척했고 4대에는 대통령 및 정계 진출로 권력과 명성을 얻으며 이민자 승리의 전형을 보여줬다. 케네디가를 탄생시킨 가난한 농민이었던 패트릭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당시 아일랜드계 가톨릭 교도들은 사회의 최하층에 속해 있었으며 멸시와 천대 차별을 받는 계층이었다. 이런 일가를 권력과 명성을 지닌 미국의 대표적인 명문가문으로 끌어올린 힘의 원천은 '대가족주의'로 알려졌다. 또한 케네디가만의 가정교육과 철학이 있었다. 케네디가를 이끌었던 조셉 케네디는 자신의 아버지가 가르쳐준 "1등을 하라! 2등 이하는 패배다"라는 가훈을 자식들에게 심어주며 강한 경쟁의식을 가지게 했다. 조셉 그 자신도 그러한 정신을 물려받아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아일랜드계 출신의 주영 대사가 됐다. 아내 로즈마리는 보스턴 시장 자리에 두 차례나 올랐던 아일랜드계 출신 피츠제럴드가의 장녀였다. 어려서부터 외국을 여행했으며 지적인 미국 여성의 표본이었던 로즈는 자식 교육에 있어서만은 전통을 따르고 엄격했다. 그 당시에도 케네디가는 부자였지만 검소하게 키웠다. 거기에는 할아버지로부터 아버지로 아버지로부터 아들로 아들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대가족 공동운명체라는 정신이 깔려있었다. 여기에 세대를 거치면서 재력을 사회에 환원하면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몸소 실천해 가족중심에서 사회에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케네디가의 교훈 중 "이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행동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것이다."를 대중들이 교훈으로 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이은영 기자 eyoung@koreadaily.com

2009-08-26

4남 5녀 중 한명 남아…케네디가 1세대 형제

정계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케네디 가문의 역사는 영광과 함께 쓰라린 비극으로 점철된 한편의 대하드라마와도 같다. 케네디 가문의 형제들은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 가톨릭 신자이며 수려한 외모와 하버드대를 졸업한 수재들로 민주당원이라는 것이 공통점이다. 그러나 이들 형제와 그 후손들은 대통령을 꿈꾸다 총탄에 유명을 달리하는가 하면 비행기 추락과 같은 비극적 사고로 목숨을 잃거나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는 등 '케네디가의 저주'라는 용어를 탄생시킨 역사의 주역들이다. 장남 조셉은 2차대전에 참전 공군 폭격기를 몰고 출격임무를 수행하다 전사했다. 그의 동생 존 F. 케네디는 40대의 젊은 나이로 35대 대통령에 당선됐으나 63년 댈러스에서 총탄에 쓰러졌다. 일곱째인 로버트는 대통령에 오른 형 존에 의해 법무장관에 기용됐다가 뉴욕주 상원의원을 거쳐 민주당 대선후보로 나서 백악관 입성을 목전에 뒀으나 68년 LA에서 유세도중 암살당했다. 막내인 에드워드는 20대의 나이에 매사추세츠주를 대표하는 상원의원에 당선됐으나 몇몇 스캔들로 대권의 꿈을 이루는데는 실패했다. 자매들 가운데는 첫째이자 1세대 형제자매 가운데 셋째인 로즈마리는 정신지체로 태어나 2005년 87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넷째인 캐슬린은 48년 비행기 추락사고로 숨졌다. 다섯째인 유니스는 장애인을 위한 봉사활동에 평생을 헌신하면서 장애인올림픽을 출범시켰다. 그는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숨지기 2주전 유명을 달리했다. 여섯째 패트리샤는 2006년 사망했으며 1세대 형제자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여덟째 진 케네디 스미스(81)는 클린턴 행정부에서 5년간 아일랜드 대사를 지냈다.

2009-08-26

오바마 "가장 위대한 상원의원…가슴 무너져"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 상원의원(매사추세츠)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포함 지구촌 각국 정상들이 잇따라 애도의 뜻을 표하고 있다. 케네디 의원이 숨진 자택 인근인 마서즈 빈야드에서 여름 휴가를 보내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은 26일 "사자같이 용감하고 가장 위대한 상원의원이었던 케네디 의원의 사망 소식에 가슴이 무너지는 심정"이라며 "대통령 선거에서 나를 지지해 주었던 그의 타계로 미국 정계의 한 페이지가 막을 내렸다"고 말했다.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도 "나는 그가 보여준 확고부동한 공적 서비스를 존경했다"며 애도했다. 고든 브라운 영국 총리는 "병마와 죽음에 직면해서도 일생의 업적을 위해 싸우는 것을 결코 멈추지 않았다"고 평가했으며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도 "공평함과 정의.기회의 가치를 위해 헌신한 진정한 공인"이었다고 추앙했다. 케빈 러드 호주 총리는 "미국 정치에 특별한 헌신을 했으며 세계에서 미국이 갖는 역할에도 특별한 기여를 남겼다"고 말했다. 브라이언 코웬 아일랜드 총리는 "미국은 위대하고 존경받는 정치인을 잃었으며 아일랜드는 진정한 오랜 친구를 잃었다"고 슬퍼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스라엘의 훌륭한 친구"였다고 애도를 표했다. 하미드 카르자이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은 "2005년 보스턴에서 케네디 의원과 만나 아프간 평화 구축 방안을 논의했다"고 회상하고 '깊은 슬픔'을 느낀다고 말했다. 공화당 인사들도 애도 물결에 동참했다. 아놀드 슈워제네거 가주 지사는 "그는 전 세계에 '상원의 사자'이자 사회 정의의 챔피언.정치적 우상으로 알려졌다"면서 애도했다. 케네디 의원의 조카인 마리아 슈라이버의 남편이기도 한 슈워제네거는 "개인적으로 그의 경험과 충고를 듣고 도움을 받으며 성장해왔다"고 덧붙였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부인 낸시 여사는 "정치적 차이점은 있지만 사람들은 때때로 로널드와 내가 케네디 일가와 얼마나 가깝게 지냈는지를 보고 놀라곤 했다"면서 "테드(케네디 의원의 애칭)와 나는 줄기세포 연구에서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으며 그를 동료이자 가까운 친구로 여겼다"고 강조했다. 봉화식 기자

2009-08-26

막 내린 '정치 명가'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이 25일 매사추세츠주 히아니스 포트의 자택에서 뇌종양으로 별세함에 따라 정치 명가가 막을 내리게 됐다. 9남매의 막내인 에드워드의 별세로 '대표적 정치 명문' 케네디 집안의 1세대 형제들이 모두 사라지며 미국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게 됐다. 케네디 의원은 워싱턴DC 인근 알링턴 국립묘지의 존 F. 케네디 대통령.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묘소 바로 옆에 안장될 예정이며 이에따라 미국 현대정치를 이끌었던 케네디 집안 3형제가 한곳에서 영면하게 됐다. 맏형인 존 F 케네디가 대통령으로 재직하던 1962년 매사추세츠주에서 상원의원에 당선된 이후 48년째 지역구를 지켜온 그는 보건.인권.외교 부문에서 괄목할 만한 정치적 업적을 남긴 미국 의회사의 산 증인으로 꼽힌다. 두형이 모두 흉탄에 유명을 달리한 뒤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로 선출되며 여러차례 대통령 후보로 하마평에 올랐으나 그때마다 여성 관련 스캔들로 도중하차했다. 지난해 대선에서는 투병중임에도 버락 오바마 후보를 지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에 기여하기도 했다. 한편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백악관을 비롯한 워싱턴DC 연방정부 건물과 의사당에는 26일부터 성조기가 조기로 게양됐다. 봉화식 기자

2009-08-26

미국 대통령, 역사와 기묘한 인연···링컨 비서는 케네디, 케네디 비서는 링컨

미국 대통령은 곧 미국의 역사다. 워싱턴·링컨·케네디 등 한국의 위인전에도 빠지지 않는 미국 대통령들을 알아보자. ■ 초대 대통령 워싱턴 유일한 100% 득표율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89년 선거인단에 의해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선출됐고 1792년에도 만장일치로 재선됐다. 미국 대통령사에서 유일한 100% 득표율이다. 그는 세계 최초로 고안된 대통령이란 자리가 어떤 역할과 권한을 가지는지를 스스로 정해야 했다. 그는 국정을 최종 결정하기 전엔 항상 각료와 토론을 거치도록 해 민주적 의사 결정 전통을 만들었다. 워싱턴은 유럽 강대국인 영국.프랑스의 주도권 다툼 사이에서 중립과 불간섭 정책을 폈다. 또 전쟁을 결정할 때는 미국의 국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하고 어떤 세력과의 항구적인 동맹은 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민주.공화당 지지기반 100여 년 만에 뒤바뀌어 민주당과 공화당이 처음부터 존재한 건 아니다. 하지만 2개 당파의 경쟁과 대립은 건국 초기부터 미국의 오랜 전통이었다. 초대 워싱턴과 2대 존 애덤스는 '연방파'로 불렸다. 주(state)들의 연합체인 미합중국을 건설한 이들은 연방정부의 이익을 우선하는 중앙집권제를 추구했다. 연방파의 배경엔 산업자본가들이 있었다. 반대편엔 주정부의 자치를 중시하는 '공화파'가 농장주들의 지지를 받았다. 공화파인 3대 토머스 제퍼슨은 미국 내 최초의 정당인 '민주공화당'(민주당의 전신)을 세워 대통령에 취임했다. 두 세력은 외교정책에서도 친영국-친프랑스로 맞섰다. 이후 연방파는 몰락했고 민주공화당은 6대 존 퀸시 애덤스까지 네 번 연속 대통령을 배출했다. 한동안 대선은 민주공화당의 '집안싸움'이었다. 서민적이고 고집이 셌던 7대 앤드루 잭슨이 당선되자 민주공화당은 잭슨파와 반잭슨파로 분열됐다. 잭슨은 당명을 '민주당'으로 바꿨고 반대파는 '휘그당'을 만들었다. 휘그당은 주로 북부 공업 지역의 지지를 받아 윌리엄 해리슨(9대)에서 밀러드 필모어(13대)까지 4명의 대통령을 배출했다. 19세기 중반 한층 격렬해진 노예제 논쟁은 어정쩡한 태도를 보인 휘그당을 몰락시켰고 노예제 반대론자로 뭉친 '공화당'이 부상했다. 민주당 출신의 프랭클린 피어스(14대)와 제임스 뷰캐넌(15대)이 노예제에 대한 해결책을 내놓지 못하자 북부의 유권자들은 최초로 공화당 출신인 16대 에이브러햄 링컨을 선택했다. 이후 북부의 내전 승리로 공화당은 21대 체스터 아서까지 6명의 대통령을 연속 배출했다. 민주당은 28대 우드로 윌슨이 당선될 때까지 스티븐 클리블랜드(22 24대) 한 명의 대통령만 배출하는 암흑기를 보냈다. 윌슨은 내전 이후 최초의 남부 출신 대통령이었다. 그는 연방정부의 권리를 옹호하고 진보적인 정책으로 '민주당=진보'라는 이미지를 구축해 나갔다. 32대 프랭클린 루스벨트(민주당)가 대공황을 성공적으로 진정시킴에 따라 민주당은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간 공화당의 텃밭이었던 흑인 등 소수자들이 뉴딜정책 덕분에 민주당 지지로 돌아섰다. 이후 민주당은 존 F 케네디(35대) 린든 존슨(36대) 등이 인종 평등 정책을 추구하며 진보 성향을 굳혔다. 공화당은 신냉전을 이끌고(40대 로널드 레이건) 감세 정책을 주도(43대 조지 W 부시 등)하며 보수적 색깔을 강화했다. 내전 때 민주당을 분신처럼 여겼던 보수 성향의 남부 주민들은 공화당 지지세력이 됐다. 100여 년 만에 양당의 지지 기반이 정반대로 바뀐 셈이다. ■ 무능한 대통령 대부분 위대한 대통령 앞뒤로 재임 미국 학계와 언론은 여러 차례 자신들의 대통령에게 순위를 매겨 왔다. 거의 항상 워싱턴-링컨-프랭클린 루스벨트가 1~3위를 차지했다. 반면 밀러드 필모어(13대) 프랭클린 피어스(14대) 제임스 뷰캐넌(15대) 앤드루 존슨(17대) 워런 하딩(29대) 허버트 후버(31대) 지미 카터(39대) 조지 H W 부시(41대) 등은 대부분 순위에서 하위권을 면치 못했다. 두 부류의 차이는 무엇일까. 상위권 세 대통령은 모두 국가의 운명을 건 전쟁을 치렀다. 루스벨트는 초유의 대공황을 거쳤다. 모두 용기와 현명한 결단으로 국가적 위기 상황을 극복했다. 그들이 위기 상황에서 대통령에 취임한 것은 이런 점에선 행운이었다. 반면 무능한 지도자로 낙인 찍힌 대통령들은 너무 평화로운 시대에 대통령이 됐거나 '성공한 대통령'의 들러리였다. ■ 43명 중 26명이 변호사 출신… 장군도 3명 대통령의 전직 43명의 대통령 중 26명이 변호사 출신이다(오바마는 44대 대통령이지만 스티븐 G 클리브랜드가 22.24대 두 차례 재임했기 때문에 역대 대통령 총 수는 43명이다). 15명이 주지사 경력을 보유한 것을 비롯 대부분이 상.하원의원 등 정치인으로 경력을 쌓았다. 예외는 재커리 테일러(12대) 율리시스 그랜트(18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34대) 세 명인데 각각 멕시코 전쟁 남북전쟁 제2차 세계대전에서 영웅으로 떠오른 장군이었다. 14명은 부통령을 지낸 후 대통령이 됐다. 젊은 대통령 늙은 대통령 흔히 케네디(44세)가 가장 젊은 나이에 대통령이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1901년 당시 부통령이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대통령 윌리엄 매킨리가 피살되자 43세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케네디는 선거로 뽑힌 가장 젊은 대통령이다. 레이건은 역대 가장 노령인 70세에 대통령에 올라 78세까지 재임했다. 한 달짜리 대통령 12년짜리 대통령 9대 해리슨은 눈보라 속에서 1시간45분간이나 취임연설을 한 후 폐렴으로 앓아누워 31일 만에 사망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재선까지만 출마한다는 전통을 깨고 4선에 성공해 12년1개월8일간 재임했다. 조손 대통령 부자 대통령 6대 존 퀸시 애덤스는 2대 존 애덤스의 아들이다. 최단임 대통령 윌리엄 해리슨의 손자 벤저민 해리슨은 23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12촌 형이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아버지 조지 H W 부시가 물러난 지 8년 만에 대통령에 올랐다. 힐러리 클린턴이 지난해 대선의 승자가 됐다면 미국 41~44대 대통령은 부시-클린턴-부시-클린턴이 될 뻔했다. 대통령 이후 일부 대통령은 퇴임 후에도 의원으로 활동했다. 존 퀸시 애덤스는 대통령 퇴임 후 18년 동안 연방 하원의원으로 활동하며 앞장서서 정부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공화당 소속으로 두 차례 임기를 마친 후 4년 만에 진보당을 창당해 다시 대선에 도전했다가 실패했다. 변호사 출신의 윌리엄 태프트(27대)는 퇴임 후 대법원장에 임명돼 10년간 봉직했다. 링컨과 케네디의 기묘한 인연 이들은 100년 간격으로 하원의원(1846 1946년)과 대통령(1860 1960년)에 당선됐다. 둘 다 부인과 동석한 자리에서 뒤통수에 총을 맞아 사망했다. 링컨 암살범은 극장에서 범행을 저지르고 창고에서 잡혔고 케네디 암살범은 창고에서 총을 쏜 후 극장에서 잡혔다. 케네디란 이름을 가진 링컨의 비서와 링컨이란 이름의 케네디 비서는 모두 암살당할 장소에 가지 말라고 조언했다. 둘 다 '존슨'이란 이름의 부통령(앤드루 존슨.린든 존슨)이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이충형 기자

2009-08-20

캐롤라인 케네디 상원진출 포기 왜? '가문 전통보다 아이 보호 택해'

지난 1월 상원 진출을 포기했던 캐롤라인 케네디의 포기사유가 밝혀져 주목을 받고 있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 딸이자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조카딸인 캐롤라인 케네디는 지난 1월 힐러리 후임으로 뉴욕주 상원에 진출하려던 계획을 포기했었다. 그당시 캐롤라인은 데이비드 패터슨 뉴욕 주지사를 만난 자리에서 "개인적 사유" 때문에 중도하차 하겠다고 밝혔다. 캐롤라인 상원의원 중도하차 발표는 케네디 가문에서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을 뒤이을 정치인을 더이상 배출하지 못하게 됐다는 것으로 주목을 받았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에드워드 클라인은 '테드 케네디:결코 사라지지 않는 꿈'에서 케네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캐롤라인이 상원에 진출하려했던 과정과 포기 배경 등을 상세히 소개했다. 클라인은 "캐롤라인이 데이비드 패터슨 뉴욕 주지사가 힐러리 클린턴 의원의 입각으로 공석이 된 상원위원 후보로 자신을 즉각 지명하지 않은데 대해 화를 낼 만큼 상원 진출을 향한 야망이 컸다"고 전했다. 캐롤라인의 정계진출 야망은 삼촌인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이 뇌암 판정을 받자 가문의 전통에 따라 정계에 진출해야한다는 판단에서 비롯됐었다고 클라인은 설명했다. 캐롤라인은 마이클 블룸버그 뉴욕시장과 차기 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은연중에 자신을 강력 후원하자 상원의원 지명은 "자동으로 자신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정계진출의 상황이 급박하게 변하면서 좋은 가문 출신의 전형이었던 캐롤라인의 언행이 거칠어지고 점점 변하고 있다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이런 상황에서 캐롤라인을 현실로 되돌린 것은 다름아닌 '아이들'이었다. 상원 의원 진출에 몰입하고 있는 자신이 점점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고 있다는 아이들과 남편의 말이 캐롤라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연일 신문을 장식하던 캐롤라인은 바로 패터슨 주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상원의원 보선출마 철회를 전했다. 존 F. 캐네디 대통령과 최고의 퍼스트레이디로 화제를 뿌렸던 재클린 케네디의 딸로서 백악관에서 자란 캐롤라인은 '가족' 개념이 남다르다. 희망과 긍정의 상징이었던 케네디 대통령은 또한 가장 이상적인 미국인 가정으로 주목을 받았다. 언니와 남동생 사망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 등 가족의 수많은 비극을 6세 이전에 겪은 캐롤라인은 가문 전통보다 가족을 선택했다. 이은영 기자 eyoung@koreadaily.com

2009-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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